다이어리/기억할 문장

마태오복음 26장 29절

miff 2023. 4. 29. 12:15

2018. 8. 17. 18:52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개역개정 4판)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가톨릭 성경)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자의적 해석이 많습니다 .주석서나 강해서 없이 독자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기독경 묵상입니다.


1. 새것으로 마시는 날 까지는 마시지 않겠다. "새것"이 무엇이냐고 정의내리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다.

 

2. 일단, 여기서 볼 수 있는 것 첫 번째,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육체 신앙이 있었다. 그리스도 육체 신앙의 내용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육체에 관해서도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복음사가가 기록한 예수가 (어쩌면 심하게) 덧붙여진 예수라고 하더라도 '순수' 신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근거는 없고, '몸'에 대한 신앙이 눈에 보여서 그렇다고 믿는다는 말밖에 못하겠다. 여기서 드러나는 몸 신앙이란, 성부 우편에 계신 성자의 '몸'과 관련된 신앙이다. '마신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기에 한번 상상해봤다. 어떤 몸일는지 몰라도, 바울로 사도의 가르침처럼 - 지금과는 다른 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든다 :)


3. 나에게 이 구절은 항상 난제 중의 하나였다. 그냥 의미 자체를 깨달을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이 구절을 읽자마다 든 생각을 끄적거려볼까 한다. 허접한 생각이니, 가볍게 읽어주셨음 한다.

 

4. 일단, 여기서 "포도주를 마신다"라는 문장의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당시 상황은 일명 '최후의 만찬'이었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한다. (2) 성찬식을 되풀이 한다. 전자는 포도주라는 '개념'을 복음서 내용 속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끄집어낸 결과물이고, 후자는 포도주를 현대의 성찬식에서 끌어낸 결과물이다. 무엇이 더 정답에 가까울까? 뭐, 둘 다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5. 전자로 하면, (1) 그리스도께서 죽음 앞에 처할 상황이 다시는 없다. (2) 죽음 앞에 서신다고 하더라도 최후의 만찬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3) 최후의 만찬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형식 혹은 다른 사람과 벌일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로 본문을 해석할 수 있겠다.

첫 번째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영원불멸하신다는 내용을 예언 - 선언先言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냥 완전히 죽어버리신다고 볼 수도 있긴 한데, "다시 마신다"라는 의미가 본문에 적힌 것으로 보아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이랑은 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받아들이면,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데, 1) 최후의 만찬이 아닌 다른 것을 벌인다. 2) 최후의 만찬이나 다른 것이나 전혀 없다. 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1)로 했을 때 어떤 의미를 건질 수 있는지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넘어가자. 2)으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견지하신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다.

세 번째를 수용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시는 날이, 본문에 기록된 시간보다는 뒤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르게 보자면, 단순하게 공간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전자와 조화되지 않는 이상 '갈릴리'에서 만나겠다고 하신 그리스도 자기 고백과 어긋나므로 타당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6. 사실 5번은 글을 쓰면서 즉석으로 생각해낸 내용이다. 원래는 없을 내용이었는데 재밌을 것 같아서 넣어보았다. 이제 후자인, "성찬식을 다시 하지 않는다."를 해보자.

성찬식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문장보다는 '새롭게' 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내가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 생각한 내용과 맞아떨어지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식을 새롭게 정비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쓴 '새롭게'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해체 - 재구성이라는 계기와 과정과 결과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식을 유지시켜 나가신다. 현재 만들어져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성찬식을, 존중하시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서 계속 진행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7. 그렇다면, '새롭게' 하지 않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성찬식 전체, 곧 형식 - 내용 - 의미 등 전부일까? 형식만일까? 사용하는 내부만일까? 거기에 담긴 의미일까? 아마 '의미'는 새롭게 하는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본다. 의미는 새 상황, 새 시대상 등이 나타날 때마다 개혁되어야 하며 기독경도 철저히 이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내용, 곧 구성 요소일까? 이것도 아니라고 본다. 낭독문은 번역에 따라 비평에 따라 충분히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사용하는 빵, 포두주는 상황에 따라 달리질 수 있다. 현제도, 교파 혹은 종파마다 다르지 않나. 그러면 형식일까? 형식도 내용과 마찬가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흠 그렇다면 대체 뭘 새롭게 하지 않는 것일까? '조화'를 이룬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연결돼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생기'랑 연결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개념이 없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쓰는 정도로 '용어'가 잡혀 있지는 않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한계) 인연생기라고 하여도 독립적 개인을 분리할 수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분리된 독립적 개인은 개인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타자, 타인, 다른 사람, 다른 사회, 내가 속한 사회, 내가 인지하는 세계,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 가지적 구성물, 비가지적 구성물, 가시적 구성, 비가시적 구성 등 다양한 어떠함이 연합하고 결합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성립한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형식, 내용, 의미, 이런 것들은 달라질지 몰라도 이 조화는 달라지지 않는다. 조화로 인한, 뭉침으로 인한, 함께함으로 인한, 엮임으로 인한, 얽매임으로 인한, '성찬'은 없어지지 않는다.


8. "새 포도주"를 마실 때는 언제일까? 레오 슈스터라는 작자는, 그리스도신자라면 누구나 "고대하는 그 위대한 날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기술한다.(뉴시티 교리문답 해설, 219쪽) 이를 따라가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신자라면 누구든지 '그날'을 고대한다. 그날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고, 상상력에 따라 다른다. 비슷해보여도 다 다른, 수억 개의 '그날'이 있으리라. 우리의 생각과 아주 다를 수도 있고 어느정도 일치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그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9. 조금 추측을 해보자면, '그날'이 다가오면 그리스도께서는 "새것"을 "그날"에는 마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진행하는 성찬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뭐 그건 나도 모른다. 쩝. 종말론을 공부하면 더 재미있게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