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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록 비평가의 이우환

miff 2023. 5. 5. 10:49

2018. 9. 9. 23:37

2018. 9. 10. 18:30

2018. 9. 10. 18:47

 

 

아래 본문은,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인 <이우환 공간>의 팜플렛에 적힌 글입니다. 미주는 제 것입니다. 문제 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LEE Ufan contre

(against) LEE Ufan

이우환의 조각 작품인, 돌과 철판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전시장 바닥에 놓여 있을 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 돌과 철판 사이를 지나다니지 못한다. '대화'중인 듯한 돌과 철판 사이를 디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슷한 돌과 철판인데도 어떤 때는 묵언의 대담을 나누는 듯 경건해 보이기도, 어떤 때는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는 듯 롱샌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전시 장소마다 그 느낌을 달리한다.

 

솔직히 돌과 철판이 이처럼 의인화되는 느낌이 들 때마다, 로깡탱의 구토가 되살아온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앙투안 로깡탱은 자갈을 집었을 때, 자갈이 살아있다는 느낌 때문에 구토를 느낀다). "꽃을 꺾으면, 꽃이 아파요"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유치한 감성을 거린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이우환의 조각은 이러한 감성을 돌연 불러일으키며, 이성의 질서를 혼동시키고, 자아가 생략된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자연에서 가져온 돌과 공장에서 생산된 철판(혹은 철봉)이 이우환의 조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작가가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면에 작가는 돌이 원래 있었던 장소에세 가졌던 관계성을 복구하고, 돌과 철판을 어떤 가능한 관계성 속에 두려고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한다. 하지만, 왜 그는 작가의 개입을 물질화하지 않을까? 그가 가장 반대하는 근대적 자아상과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식이 개입된 만들어진 오브제[1]가 조각에서 사라짐으로써, 데카르트적 '자아'도 에포케[2]된다. 그래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단지 예술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이우환도 자신에서 벗어나 외부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우환의 조각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석과 공장에서 만들어진 철판을 가져다 놓지만, 레디메이드[3]가 아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질 수 없는 것'('언어화 될 수 없는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만들어 질 수 없는 부분은 자아가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자 자아가 규정할 수 없는 외부를 대면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예술은 일종의 암시"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그의 회화도 포함된다.

 

하얀 바탕의 커다란 캔버스에 하나, 둘, 많아야 서너 개의 점[사각형의 붓 자국, 편의상 '점'으로 명칭]이 그려진다. 조용히 이 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점(들)은 캔버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오며 공간에 울림을 만든다. 어느 순간 이 점(들)보다는 공간의 울림에 집중하게 된다. 수영을 하다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겨서 스스로 물결의 흐름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듯이, 그렇게 공간의 울림에 스스로를 맡기게 된다. 이러한 공간의 체험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공간의 울림으로 인해 열리는 새로운 장소, 즉 "여백현상"(이우환)을 경험한다. 이러한 이우환의 회화에서는 '절제, 윤리, 숭고'라는 서로 다른 개념이, 마치 한 개념의 세 가지 차원처럼 연결된다. 우선, 그는 방법론적으로 엄격히 절제된 표현을 통해, 작가의 개입, 즉 '자아'를 최소화하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회화에서는 '그려진 부분'보다 '그려지지 않은 부분'('그려질 수 없는 것')이 많다. 작가의 행위를 포함하여 각각의 마티에르[4]가 서로의 영향을 자제하고 공간을 양보함으로써, 캔버스, 붓, 숨결, 행위 등이 각각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여러 요소가 모여서 서로 공존함으로써 관계가 발생되고,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표현이 생성된다. 이우환은 이 관계가 "윤리적인 발상"에서 근거된다고 말한다: "윤리란 주변과 남과의 관계에서 어떤 예의라든가 규범이라는 것이 생겨나기에, 어떨 때 윤리성 혹은 도덕성이 나타나는지 알기 쉽다. 즉, 남과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는가? 서로가 '예의'를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오는 것이 윤리다. 이 윤리성은 숭고성과도 관련된다." 이우환에게 있어서 '절제적'이라는 방법론적 차원은, '윤리적'이라는 관계론적 의미와 연결되고, '숭고성' 혹은 '영원성'이라는 미적, 초월적 차원으로 인도된다.

 

'외부 혹은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이우환은 "현대적인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작업[제3자나 기계의 힘을 빌리디 않고 직접 작업하는 방식]하면서, 신체성과 외부성이 더 많이 관여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신체는 외부와 부딪히는 (관계를 갖는)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팝아트가 지배하는 '기술복제의 시대에 읻어버린 예술성의 아우라'(발터 벤야민)와도 관련된다. 아우라는 기술적인 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과 마티에르의 직접적이고 윤리적인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외부와의 직접적인 부딪힘에서 발생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한 자아가 부서질수록, 자아가 외부와 교류할수록, '영원성'에 가까워 진다. 마치 폐허가 된 옛 그리스 신전에서 맛볼 수 있는 '멜랑콜리한 영원성'의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아폴론적'[5]으로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온 힘을 다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디오니소스적'[6]으로 이를 부수려는 외부를 적극 도입하는 이러한 양극적인 것의 "주기적인 교서"(니체)에서 예술이 태어난다. 이렇게 이우환의 예술은 끊임없는 양극의 부딪힘과 그 사이를 오가며 생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술사적으로, 이우환의 예술은 도전적이고도 놀라운 세계의 표현이다.

 

- 심은록(미술비평가)

 


[1] 일반적으로는 물건, 물체,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이나, 미술에서는 주제에 대응하여 일상적 합리적인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출처 : http://monthlyart.com/encyclopedia/오브제/ )

 

[2] 1) 그리스 회의론자들이 사용한 말로 '판단의 보류'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판단을 보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태도를 가리킨다. 2) 후설의 현상학에서도 현상학의 대상이 되는 영역을 획득하는 방법으로서, 자연적 관점에 기초한 판단을 괄호에 집어넣어 판단을 중지하는 작용을 연상학적 에포케(phänomenologische Ephoche)라 부른다. (출처 :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5&idx=2484 )

 

[3]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창조해 낸 이후 예술적 측면에서 깊고 다양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된 용어이다. <...> 발견된 오브제가 아름다운 것인가 특이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기호인 것이다. 기성품의 선택은 미적인 즐거움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선택은 시각적인 무관심에 기초한 것이다.(출처 : http://monthlyart.com/encyclopedia/레디메이드/ )

[4] 일반적으로 표현된 대상 고유의 재질감 (출처 : http://monthlyart.com/encyclopedia/마티에르/ )

 

[5] 아폴론은 질서정연하고 형식적이며 조형미와 질서, 형식의 예술을 통해 이상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를 형성하는 신으로, 무엇 보다 이성적이며 현악기를 상징. (출처 : http://noart.egloos.com/4909373 )

 

[6] 디오니소스는 카오스와 황홀경, 도취적인 술의 신이며 아폴론이 상징하는 형식을 파괴하며 통제되지 않아 누구보다 감성적인 관악기를 상징하는 신. (출처 : http://noart.egloos.com/49093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