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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논쟁자 예수"/ 마 21:23~32 (페이스북, 이택환) {+ 본인 생각}

miff 2023. 4. 13. 22:56

2017. 9. 30. 23:42

 

(마 21:23-32)
23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로 불리는 존 스토트의 <논쟁자 그리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온유하고 양순하신 분’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위선을 지적하실 때, 예수님은 거침이 없으셨는데, 우리가 이를 놓치는 면이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논쟁,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사야의 비전은 메시아의 때가 되면, 세계 모든 사람들이 차별 없이 성전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데,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성전을 이방인과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미움을 제조하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논쟁자 그리스도답게’,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전세를 역전시키십니다.

예수님의 논쟁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논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백성들을 어그러진 길로 인도할 때 그들과 논쟁하셨습니다. 그들이 논쟁을 걸어올 때 마지못해 참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논쟁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논쟁을 하실 때에도 논쟁에 매몰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자들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심으로 그들이 이전에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논쟁은 그 중심에 항상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나는 동성애자다/아니다. 나는 동성애를 지지한다/지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논쟁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논쟁에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있다면 동성애자들을 배제한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2017. 10/1, 성령강림주일 후 열일곱 번째 주일, 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교회력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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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선을 지적하실 때, 예수님은 거침이 없으셨는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약해야 합니다. 약한 모습이 인간이 지닌 진짜 모습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단 하나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약한 모습이 만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도 공생애 사역(약 3년)을 행하실 때, 항상 약한 모습을 유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항상 기다리는 모습, 하나님 뜻대로 자신을 죽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모습이 과연 '유약한' 모습만 있을까요? 정반대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역겨운 행위에는 마땅한 견책을 가해야 합니다. 아주 본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약하되, 강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강하되, 오랜 기간동안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은 후에야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오래 참음(곧 인내)'와 '분노' 두 가지를 모두 간직해야 합니다. 분노는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음이 좋지만요.

참을 때와 터뜨릴 때를 잘 구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을 잘 판별하여 진리를 보존하려고 끝가지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지도자들과 논쟁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신약에서 현대까지 계속해서 '대표성'과 '책임'을 중요시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성을 띄고 책임을 지녔다는 말은, '권리'를 지녔다는 말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대표성과 책임을 지닌 자는, 보다 적은 대표성과 책임을 지닌 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권리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주신 이유를 잘 묵상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십니다.

대표성과 책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목회자를 자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부정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구원 받은 권리를 얻었기에 모두가 대표성과 책임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코람데오(Coram Deo) 신앙을 잃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3. 먼저 논쟁거리를 만드셨습니다.

죄는 항상 자신을 숨기려 합니다. 죄의 본성이 '숨김'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숨기려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선생이 자기네한테 있는 치부를 드러내고 싶어할까요, 잘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태도를 지녀선 안 되겠습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악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본성을 거슬러서 스스로 고백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는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치부, 곧 숨으려 하는 죄를 죽이기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가 취하던 태도는 태도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 교사만이 공의회(현재로 치면 '국회의사당')에 들어갈 수 있었기에,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사회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공공성을 띤 의식을 고취해야 합니다.

 

4. 논쟁에 매몰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논쟁 밖'에서 '논쟁 안'을 다 보셨습니다. '논쟁 밖'에서 '논쟁 안'에 참여하셨습니다. 논쟁 자체에 집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논쟁에 심취해선 안 됩니다. 논쟁 자체가 어떤 힘도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논쟁은 어느 누구 하나도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도구는 '사랑'입니다. (2)논쟁에 참여는 하되 더 큰 목적을 바라보면서 논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논쟁이 의미 있게 됩니다.

 

5. 중심에 항상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논쟁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가르치셨고, 성경 곳곳에서 가르치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 영광', '하나님 통치', '하나님 권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논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논쟁을 하는 지혜도 생깁니다. 쓸데없는 논쟁과 필수불가결한 논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결론이 가장 아름다운 결론인지 깨닫게 됩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중심에 두고 논쟁을 하게 되면, 누구와 논쟁하든지 간에 '관계'가 틀어지지 않습니다. '분쟁'하고 '분열'하지 않습니다. 다 똑같은 하나님께서 입양한 양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논쟁에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영원토론 영광'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 땡야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뭘 하든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 되기를 기원합니다.

 

6. 하나님 나라가 없습니다.

6번은 '한탄'이지 않을까요. 현 한국교회, 한국에 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많은 교회,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아내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한탄이 아닐까요. 우리는 일평생 논쟁합니다. 교회에서 뭘 하고 뭘 안 할지,라는 큰 범주 안에 다 넣을 수 있겠지요.....

2017년 총회, 각 교회에서 행하는 갖가지 논쟁(동성애, 이슬람 같은 주제)에서 이제 그만 눈을 뗴고, 논쟁을 '하나님 나라 성취 디딤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게 일깨워주고 싶으신 가르침, 깨달음이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던지셨던 질문과 같은 '회의', '질문', '의문'을 지님으로 그리스도께 지혜를 허락하신 성부를 우리가 더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