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8. 12:2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욱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장 16절)
서론
우리네가 교회에서 많이 듣는 구절입니다. 성경 좀 읽으라는 권고를 받을 때 많이 언급하곤 합니다. 또 어떨 때 얘기합니까? 한국 보수 개신교에서는, "성경은, 단어 하나와 어투 하나도 틀림이 없어! 왜냐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썼으니깐!"이라는 주장에 특정 근거가 필요할 때 언급합니다. 특정 근거란, '영감'입니다. '감동하심'과 비슷하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앞서 말한 "성경은, 단어 하나와 어투 하나도 틀림이 없어!"라는 주장을 '성경무오성'이라고 부릅니다. 오성誤性은 성경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성경무오성은 그리 간단하게 나오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냥, "나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어!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오하다라는 주장은, 교의학 구석구석에서 뻗어나오는 가지가 교차되면서 나타나는 종합적인 견해입니다. 성경에서 '무오'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논의하던 사람이 만들어낸 용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적집 말하지는 않지만 은연 중에 나타내는 의미를 개념화한 단어를, 2차 개념과 비슷한 단어를 써서 표현합니다. 대표적으로,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2차 개념은, 성경이 '직접' 표방하지는 않지만 받아들이는 견해가 주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무오성은 어떤 신학 조류가 교차되어 만들어졌을까요? 말하자면 너무 많아지는데, 가장 주된 신학 사상을 뽑자면 '신론'입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에 따라서 일차적으로 나눕니다. '인간론'도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의 '본질',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대표로 뽑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이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라는 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음을 설명하듯이, 성경 기자가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표현을 찾느라 우왕좌왕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없을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무한'과 '영원'과 '불변'을 주로 뽑습니다. 여기서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내용을 생각하다보면, 하나님을 설명하는 설명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무오를 이해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잠깜 멈춰서서, 다섯 신학자가 어떤 견해인지 짧게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다섯 명 모두 '복음주의 신학자'입니다.
1. R. 알버트 몰러: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성誤性이 없다고 주장(무오성을 제창)
2. 피터 엔즈: 몰러의 정반대 입장
3. 마이클 F. 버드: 무오성은 세계 기독교에서 보편적인 신학사조가 아니므로 무오성을 위협하는 대화를 막아서면 안 됨을 강조
4. 케빈 J. 밴후저: 그리스도교 전통의 무오성과 1970년대 이후 무오성의 개념이 다름을 강조하며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정통 무오성을 차용해야 함
5. 존 R. 프랭키: 단수성과 복수성을 언급하면서 선교학과 다원주의 사회를 함께 역설
출처 입력
1. 영감과 질문
처음에 '영감'이라는 개념을 제가 꺼내들었습니다. 영감이라는 개념을 수용한다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저작이 됩니다. (영감이라는 어휘가 나온 원어를 분석하면 되는데, 분량도 너무 많아지고 학식도 부족하니 넘어갈게요) 모든 저작물에는 저자 자신의 특색이 남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향취가 묻었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이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저작을 주관하실 때 어떻게 주관하셨나?" 또는 "하나님이 진리를 어떻게 말씀하시는가?"(443)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무오성 견해를 크게 그리고 잘게 나누는 갈림길은 여기입니다.
『성경 무오성 논쟁』을 쓴 저자 다섯 명(R. 알버트 몰러, 피터 엔즈, 마이클 F. 버드, 케빈 J. 밴후저, 존 R. 프랭키)은 바로 위에서 나열한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요? 다섯 명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지성, 정서, 의지)에게 스스로를 적용하신다는 선까지는 인정합니다. (이를 '신적 수용'이라고도 부릅니다.) "어떻게(방식), 어느 정도로(정도), 어디까지(범위) 적용하시느냐"라는 질문에서 다시 갈림길로 들어섭니다.
2. 무오성과 신학 사조: 신론과 영감
먼저, 한 갈림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적용하실 때 '오점'을 허용하시는가?"에 긍정을 하느냐 부정을 하느냐 입니다. 엔즈를 제외한 네 신학자는 '일단은' 부정입니다. 정도에 따라 스펙트림이 넓지만, 편의상 부정으로 놓았습니다. 알버트 몰러는 성령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도록 '보호'하셨다라는 주장입니다. 마이클 버드는 각 상황에 맞게 자신을 적용하시지만 이게 "오류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라"(443)고 주장합니다. 존 프랭키는 인간 언어 자체가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적용하셔서 말씀하시는 진리도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케빈 벤후저는 몰러와 입장이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는 게 제일 좋습니다. 언어학 측면을 계속 언급합니다.)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화행(speech act)' 이론에 관해서 참되시다고 주장합니다. 피터 엔즈는 "오류 가능성이 있어!!!!!!"라고 주장합니다. '긍정'입니다.
다른 갈림길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영감하셔서 스스로 원하시는 내용을 기록하셨는데, 어떻게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 무오한 텍스트를 보존했는가?" (단어와 어휘에 영감하셨다라는 주장은 축자 영감이라고 하는 걸 기억하고 읽어봅시다!) 알버트 몰러는 성경 기자 개개인의 개성은 존중하되, 한 단어 한 단어 안에 자신의 숨을 주입하셨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축자 완전 영감'이라고 칭합니다.) 캐빈 밴후저는 축자 영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담론'이 기술하는 전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 텍스트가 "삼위일체적 신적 담론"에서 일부분을 차용한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마이클 버드는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성경의 '진실성'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면서 보존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축자 영감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프랭키는 인간 언어가 지닌 한계 안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고 주장합니다. 피터 엔즈는 '영감'을 거의 거부하는 듯 보입니다만, 고대를 산 사람과 영원을 사는 영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를 봐야 한다며 초점을 옮깁니다.
3. 무오성과 신학 사조: 인간론과 무오성
다섯 신학자 모두 성경이, 하나님께서 적용하셨기에 '신적'이며 인간을 통하였고 사람에게 하셨다는 측면에서 '인간적'이라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위에서 아래로,는 다 동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면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인간적이라는 어휘의 의미가 무엇이냐에서도 많은 논의가 오갈 수 있겠지만, '위에서 아래로'라는 어휘랑 연결해서 여유있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피터 엔즈는 역사 가운데 있던 다양한 '조건의 굴레'에 있는 텍스트를 강조합니다. 존 프랭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넘어서 텍스트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텍스트를 "성령론적 매개 수단"으로 보면서 '복수성'을 강조합니다. 알버트 몰러는 신과 인간이 이중 저자로 기록한 책이지만, 오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지만 죄가 없으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개성을 담은 성경으로 표현되지만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마이클 버드는 각각의 다른 상황에 성령께서 내적으로 주신 인간적이고 신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케빈 밴후저는 (앞에서도 말한) "삼위일체적 담론"에서 나오는 인격적 말씀을 성경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 부분은 밴후저가 뭘 말하는지 모르겟어요 흫허허허허ㅓㅓㅓ
4. 그럼에도, 성경은 '진리'다?
마지막 질문은, "그렇다면, 성경은 진실로 진리를 말하는가?"입니다. 이 부분은 447-449쪽에서 그냥 따왔어요... 흑 알버트 몰러는 성경의 모든 텍스트에서 확언 몇이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있었던 사실의 진술이 문학 양식 속에 녹았다는 주장입니다. 피터 엔즈는 "성경이 경험적으로 [...] 거짓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적인 흐름에 따른 '제약' 안에서 진리를 말씀하신다고 봅니다. 존 프랭키는 하나님이 아시는 진리가 있지만 상황적으로만 깨달는 인간이 마주치는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진리의 다양한 측면이 보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선교'와 연결합니다. 케빈 밴후저는 '언어'를 언급하면서, 사람의 언어는 부패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스스로의 참되심을 신실하게 증거하시듯 진리도 실실하게 전하신다고 봅니다. 마이클 버드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바와 계시된 바가 증명하는 사실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다고 보며, 진리가 지극이 인격적이라고 역설합니다.
결론: 더, 더, 더!
편집자(제임스 메릭, 스티븐 M. 개릿)가 쓴 서문과 결론을 읽으면 한 가지 강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화'입니다. 무오성이 독자적인 교리가 아니니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기고자 대다수도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마이클 버드는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트 어만, 롭 벨 같은 신학자를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95). 피터 엔즈는 대화를 가로막기 때문에 현대 성서학과 타 학문이 이뤄낸 업적을 활용하지 못한다며 한계를 지적합니다(125). 존 프랭키는 질문을 통한 대화를 거부하기에 변론을 준비하지 않는 대다수 복음주의자를 겨냥합니다(366). 『성경 무오성 논쟁』의 목표는, 본인 책에 영향을 받아 다양한 담론이 나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풍성해지는 현상입니다. 『성경 무오성 논쟁』은 이 역할에 맞게 잘 짜여졌다고 생각합니다. 무오성의 본질을 기술하고, 무오성에 위협을 주는 본문을 가지고 변론하고, 다른 저자의 논평이 달리고. 분량이 많지 않음이 안타깝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좀 어려우니, 어느정도 독서력이 된다면...!
저는 보수 신학을 간직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의견은 무조건 묵살해버리는 그런 신학 말입니다. 그냥 속으로 몇 고민을 했습니다. 개 중 하나가 "성경은 왜 성경이지?"입니다. 물어볼 마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하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몰랐습니다. 스스로 책을 찾고 글을 읽고 했는데, 다들 "그냥 믿어! 나는 믿어지는데 너는 왜 안 믿어져?" 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 바트 어만이 괜히 그렇게 된 게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이 참에 바트 어만과 비슷한 길을 걸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억압이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성경 무오성 논쟁』을 이런 맥락에서 읽었으며, 저는 다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정체화하고 성경에 대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다섯 '복음주의 신학자'가 나와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무오성을 서술합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성誤性이 없다고 주장하는(무오성을 제창하는) 몰러, 몰러의 정반대 입장인 엔즈, 무오성은 보편적인 신학사조가 아니므로 무오성을 위협하는 대화를 막아서면 안 됨을 강조하는 버드, 그리스도교 전통의 무오성과 1970년대 이후 무오성의 개념이 다름을 강조하며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정통 무오성을 차용하라는 밴후저, 단수성과 복수성을 언급하면서 선교학과 다원주의 사회를 함께 역설하는 프랭키. / 서론과 결론만 확실하게 이해하면 다섯 학자의 의견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봐요. 서론과 결론에서 계속 강조하는 내용이, 무오성은 독립적인 신학 사조가 아니라 다양한 신학 내용과 교차되면서 나오는 결론임을 강조하면서 '질문'과 '대화'를 하라고 강조하는 내용이에요. / 정해진 분량이 있어서 방대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내용은 다 있다고 생각해요. 무오성이 중심, 무오성과 성 삼위 이해, 무오성을 위협한다고 보는 본문 주해, 서로를 비판함.
스펙트럼 시리즈답게 어려운데 유익하고 재밌어요. 사실 버드 중반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 지점을 지나니깐 갑자기 주장이 뒤섞여가지고 좀 힘들었어요.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인데, 그 때부터 생각이 엉기지 않았으면 제 주관이 안 나왔겠죠. 정말 힘들겠지만 진짜 읽을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는 서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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