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묵상, 깨달음

[매번 가던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

miff 2023. 4. 28. 13:51

2018. 7. 28. 21:26

 

 

1. 원래는 쓸 생각이 없던 글이다만 수련회 때마다 설명하기란 참으로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여 처음부터 작성해본다.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서 많이 이상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상당히 길다. (문장의 시제에 유의하면서 읽으면 좋겠다 싶다.) 배터리가 없어 수정을 못하고 한 번에 써내려간 글이라 깊지도 깔끔하지도 못함을 이해하시길 바라며.

 

2. 먼저 일러둘 말이 있다. 고등부 수련회를 가지 않고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작업은, 내 독단이다. 누구에게 알리고 시작한 작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한답시고 구걸하고 다니지도 않았다. 내가 수련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18년 7월 22일 전에 안 분들은 내 '선포'를 들으셨을 따름이다. 고로, 이 사건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걸고 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타자를 계속 괴롭혀서 캐내고자 애쓴다면, 아마 그 누군가를 아주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3. 내가 수련회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이 약해졌다든가의 말은 삼가길 바란다. 신앙은 결국 외면으로 드러날 따름이지만 드러나는 양태는 일편천률적이지 않다. 또한, 개인의 신앙은 혹자가 판단하고 측정할 사안이 아니다. 인간이란 무의식적으로 잴 수밖에 없지만 가급적 삼가달란 말이다. 누군가의 폭력적인 판단을 듣고 싶지 않다. 수련회에 가지 않음은, 내가 방황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예전보다 더 곧은 신앙을 갖게 됐음을 천명하는 외침이다.

 

 

4. 신앙 양태 다양성의 실례로 그리스도교 분파의 종류를 들 수 있겠으며,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도를 들 수 있다. 엘리야처럼 당당하게 다닌 선지자도 있었지만 동굴에 숨어든 선지자도 있었지 않은가. 니고데모는 사유하며 고심하고 숨어서 지냈고 사마리아인은 열정적으로 전했다만 요한복음서 기자는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고 덧붙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로 돌입하기 전에 사사(판관)가 얼마나 다양했고 다채로웠는지 눈여겨 보라. 바울이라는 사람과 베드로라는 사람의 선교 스타일도 달랐으나 둘 다 그리스도교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성인이다. 이런 사례는 널리고 널렸으며 성서에서도 수많이 찾을 수 있다.

 

 

5. 나는 왜 수련회를 가지 않는가? 한마디로 축약해서 표현하자면, "가기 싫어서"이다. 너무 간단하게 표현했으려나. 조금 더 덧붙이자면, "신께 집중할 수 없으니 가기 싫어서"이다. 이게 내 심정이요 고백이다. 중학교 때부터 생각했으며 수영로교회 고등부 수련회를 두 번 가면서 더 확고해졌다. 6번부터는 내가 수련회를 '싫어'하게 된 연고를 읊겠다. 환멸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겠다.

 

 

6. 내가 환멸을 느끼는 제일 큰 이유는, 고결한 계시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뿐만 아니라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내가 수련회에 가는 이유는 그 시간동안 우리의 신이신 분께만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그분께 집중하는 방편 중 하나가 계시를 배우고 체득하고 느끼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계시를 충분히 맛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갈 이유를 상실했다. 계시를 맛보는 시간은, 강의 • 설교 • 구원상담 정도 되겠다.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너무 속상할 따름이다.

강의는 고등부에서 한 번만 들었는데, 인간 실존과 구원에 관한 게 아니라서 아쉬웠지 다른 건 없어서 넘어가겠다. 설교는 매 수련회마다 안타까웠다. 중등부 때나 고등부나 마찬가지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설교라기 보다는, 성구 하나를 뽑고 거기서 일반 인문학 강연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을 설파하는 형식이라서 마음이 아프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구원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생략이 너무 많이 돼서 안타깝다. 창조 상태가 어땠는지 제대로 서술해주지 않으면서 죄 조차도 너무 얕게 설명해주고,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 하나 존재 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치부하는 행태가 답답하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부활로 인함인데 항상 부활은 생략돼서 화까지 날 정도였다. (건의했으나 달라지지 않았기에 기록한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는 경륜이 있을수록 더 풍성해지고 감미로워지는데 이 또한 없어 마음이 찢어질 듯 하다. 구원 상담의 상태도 설교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 부분은 8번 글에서 계속하자.

 

 

7. 다음으로는 놀기만 해서다. "수련회는 놀러 가는 게 아니다!" 수련회에서 많이 들은 얘기 중 하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어떤 구성인지. 「잠 - 밥 - 놂 - 밥 - 레크레이션 - 저녁 집회 (- 구원 상담 -) - 놀다 잠」 이게 기본 틀 아닌가? 혹자는 "친해져서 하나돼 동역자가 되기 위한 활동이다."라며 반대하리라고 생각한다. 진짜 그럴까? 놀면 친해지는 건 맞지만, 모든 사람이 함께 노는가?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조장과 게임 인도자끼리만 노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조원 중에서도 별 능력이 없거나 비적극적인 경우에는 항상 뒤편에서 홀로 서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주류끼리 다시 주류를 형성하는 작용이이었다. 또한,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피드백하는 작용은 단순히 친해지고 얘기를 많이 하면서 속내를 말한다고 해서 절로 생기지 않는다. 적합하고 마땅한 피드백은 (사실은) 상당한 지혜와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놀면서 이를 배울 수 있는가? 동역자라기 보다는 친해짐이 더 맞다고 본다. (이를 해결하려면, 노는 시간을 다른 시간으로 바꾸거나 수련회 후 관리를 하면 된다. 8번 참조)

더군다나, 나 같은 경우는 신께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갔는데 하루 종일 놀기만 하니 허무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시간만 보내야 했으며, 시간도 돈도 너무나도 아까웠다. 몇만 원을 내고 며칠이란 시간을 구입했는데, 이런식으로 흘러가서 살짝은 분개했달까, 답답했다. 내 중등부 때는 선생님들께서 특별한 신앙•성경적 주제를 택하셔서 참 많이 배웧고 유익했는데, 고등부는 그냥 조장들이 준비하니 레크레이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라.

 

 

8. 사후 관리를 안 하기 때문이다. 6번 글 후반에서 구원 상담을 비판했다. 구원상담의 내용은 설교에서 충분히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형식을 비판하고자 하는데, 이는 다분히 광범위한 비판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구원 상담에만 연관하는 문제가 아니라, 수련회 자체 그리고 매주일의 예전, 제자훈련과도 깂이 연결된 문제다.)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다르다. 비슷한 사람도 있으나 인간 개개인의 창발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마다 다르다, 가시적으로나 비가시적으로나. 이 말인즉슨, 진정한 구원을 바란다면 필요한 사항은 짧으면 5분 길면 1시간짜리 상담이 아니다. 짧으면 1년 길면 평생을 지속할 담론 대상자이다. 궁극적인 담론 대상자는 신이지만, 신은 인간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하심을 기억하자.

"수련회 때는 잘 하기로 다짐했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깐 힘이 듭니다ㅠㅜ" 수련회 후에 제일 많이 듣는 얘기다. 영성은 지극히 일상적이어야 하는데 일상을 살지 못한다는 이 모순을 어찌할고. 내가 수련회 후에도 안정적으로 신앙을 이어갈 수 있던 원동력은 (주일 공예배나 금요철야가 영향이 없진 않을 터이지만) 한 선생님과의 지속적인 교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계속되는 교제, 그리고 스스로 하는 공부였다. 내가 언급한 세 가지를 수련회 후에도 제공하지 못하는 수련회는 대체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다 잊고 시간 흘리기? '수련'은 간단히 '대회'를 여는 것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단련이어야 한다.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이게 어려움은 7번에서 다뤘다. 문제는 동역자가 생겨도 다 비슷비슷해서 서로서로 관리가 안 된다는 점이랄까.

 

 

9. 정신 나간 사람들의 집합 같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나도 미친 사람 부류에 속하긴 하지만, 다른 맥락이다. 6번 글과 연결된다. 성령론의 왜곡이라고 칭하겠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데, 어째 구하는 사람마다 이성이 가출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모습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내가 지적하는 모습은, 이런 비일상성이 일상에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정서적으로 특별한 격동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위기가 참으로 막막했다. 충분과 충만을 구분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성령'으로 축약한 모습은 내 울분을 터뜨리기에 충분하다.

 

 

10. 이런 사유로 나는 수련회에 가지 않는다. 내가 이제까지 수련회에서 받은 유익을 나열해보라면 두 가지를 꺼내겠다. 첫째는, 중등부 수련회 때 밤샘 기도를 하고(중간에 졸기도 많이 졸았지만) 오전 6-7시 사이에 이사무엘 목사님과 얘기를 나눴던 때다. 둘째는, 중등부 수련회에서 많은 선생님께서 준비하셨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다.

 

 

11. 시끄럽고 거창한 분위기에서 받은 유익이나 기억을 꺼내보라면 없다고 하겠다. 내가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쟤 달라졌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게 두려워서였다. 또한, 내가 하던 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성향이 시끄러운 쪽에서 잠잠한 쪽으로 바뀐지는 꽤 오래됐다.

 

 

12. 이런 내 한탄은 교회론 논의로 넘어가게 된다. 내가 바라는 교회는 건강하고 작은 교회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 사람들과 건강하고 작은 교회를 유지해보고 싶은 꿈도 있다. 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 고등부 수련회 같은 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내 말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냥, 이게 안 되니 안타까울 뿐. 이를 위해서는 전환이 필요하고, 전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중이다. 이의 일환으로, 수련회 대신 예수원으로 간다. 몇 사람들에게서라도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길.

 

 

(예수원 가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