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묵상, 깨달음

에베소서 5장 16절로 간단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시간'

miff 2023. 4. 29. 12:13

2018. 8. 17. 11:51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개역개정 4판)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새번역)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가톨릭 성경)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공동번역)

 

[에베소서 5장 1~21절(묵상노트)] (tistory.com)

 

[에베소서 5장 1~21절(묵상노트)]

2017. 9. 16. 10:25 한글은 개역개정 4판, 영어는 NIV(타역본일 경우 표기), 그리스어는 SBL입니다. 아래는, 청소년 개인 생각입니다. 에베소서 : 엡 1:3이 핵심구절이다(SB:CSNT;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

miffliff.tistory.com

 

이 글 제일 밑에 보면 에베소서/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16절에 관해 적은 짧은 글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후편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시간을 구속하라

"구속"이란 뭘까? 기본적으로 '구속'이라는 신학적 용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여러 갈래가 있다.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네다섯 정도 견해가 있으니 말이다. 그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는 법적 의미와 관련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를 조금 더 밀고 나가면은 '심판'이라는 개념과도 엮을 수가 있다. 이렇게 이해한 '구속'으로 위 성구를 순간 생각했다. 그 기록을 짧게나마 남기고자 한다. 결론 없고, 그냥 간단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그냥 청소년이 가볍게 한 생각이구나, 하고 읽으시면 될 듯하다 :)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법적 의미로서의 구속은 심판이라는 핵심 용어와 긴밀하다. "시간을 구속하라"라는 구절도 심판이랑 연관지어 보자. 심판이랑 연관지으면, 크게 두 갈래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한쪽 측면은, 하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시는 관점이다. 다른 해석은, 시간을 살아내는 한 존재가 주체가 되는 관점이다.

 

전자는 항상 전제돼야 하는 관점이다. 시간을 초월하기도 내재하기도 하고 시간이 필요 없기도 하신 존재, 곧 시간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항상 심판주로서도 역할하신다. 고전적인 비유를 활용하자면, 토기장이는 스스로가 만든 것을 언제든지 스스로가 부술 권리가 있다. 이 선택은 언제 내려질지 모른다. 판결 주체인 창조주-심판자와 창조주-심판주의 정보를 아주 잘 아는 존재만이 알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심판'하신다는 문장으로 읽어보자. 그렇게 읽으면 그리스도신자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 묵시록에 나오듯이, 심판 주체에 참례하는 것이리라. 이 부분에서 후자로 넘어가도록 하자.

※ 첨언 1 : ① 뭐, 토기가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면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부수지도 못하겠지만, 하나님 같은 경우에는 빼앗긴 적도 없으시고, 토기 쪽에서 주인을 거부했던 꼴인데, 예수라는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소유를 확정하셨다.  토기장이 비유가 완벽하지는 않다. (무슨 비유가 완벽하겠느냐마는, finitum non capax infinitum) 기독경 내 묵시 문학에서 가르치는 심판을 설명하지 못하고, 묵시 문학에서 가르치는 심판과 다른 모습이 묘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 기독경에서 말해지는 심판만이 전부는 아니긴 하겠지만 '창조'라는 측면에서도,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고. 소유권이라는 측면에서만 토기장이 비유를 읽어내도록 하자.

 

우리는 심판-주체로서 시간을 심판한다. 시간을 구속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시간은 심판될 수 있는 대상일까? 심판받을 수 있는 대상이기 위한 조건은 뭘까? 시간을 직접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적어도 현세태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듯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시간 안에서 발버둥 치고, 시간 안에서 애쓸 따름이다. 시간을 뛰어넘어서 시간 밖에서 「」하는 존재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무천년설을 제창하고 믿는 그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은 온전히 심판에 참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인데, 시간을 사용하는 주체를 심판한다고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참례하는 자로서 인간이 심판할 수 있는 시간 사용자는 무엇/누구일까? 기독경에서는 누가/무엇이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가? '인간'뿐이지 않나. (물론, 여기서 '인간'이 무엇인가 정의 내리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너무 방대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작업인데다가, 아직 내 실력으로는 인간 정의 내리기라는 주제의 털 끝을 1나노미터라도 건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넘어가도록 하자.) 소결을 내리자면, 심판에 참례하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신자는 시간 사용자인 인간을 심판한다고 치자.

과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몸(soma, body)을 지닌 자들끼리 심판할 수 있는가? 기독경에서, 특히나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예수는 -- 교회는 뭐라고 가르치는가. 그리고, 일반적인 공간에서 탁월했던 사람'들'은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다들 알듯이,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는 작업이 우선이다. 인간이 가장 먼저, 가장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심판해야 하는 대상을 자기 자신이다. 시간을 구속한다는 말은, 시간을 오용하는 자기 자신을 날마다 치면서 살아간다는 말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시간에 관해서 심판한다라, 이게 뭘까. 딱히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계발자들이, 습관을 형성하라는 분들이, 시간 관리 관해서 강의하시고 책을 내시는 분들이 말씀하시는 바대로 행하면서 사는 삶이 아닐까. 그러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해서 주변인을 변화시켜 나가는, 그런 생활. 스스로에 대해서 하나님께 속죄를 구하고 회개하는 삶이 이런 삶이지 않을까.

 

※ 첨언 2 : 음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사용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심판받아야 할 근거는? 제일 고전적인 답변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리라. (이 주장에서도 말하면 말할 게 꽤 있긴 한데, 넘어가도록 하자. 다 기억하지 못한다.) 또 다른 응답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헬무트 틸리케가 말한 '사랑의 선용을 연습'하는 차원에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름답게 씀이야말로 사랑을 선용함이니, 시간을 선용하지 않음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음이므로, 비그리스도신자로 살아간 생활이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서 질책 받을 생활이지 않을까. 오 이런 대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첨언 3 : 시간을 바르게 쓴다라, 이게 뭘까. '바르게'라는 기준은 뭘까? 이 부분은 내 알 바 아닌 듯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기독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만큼 다층적이고 풍부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시간을 바르게 사용했나에 관한 것도 다르지 않을까. 원론적인 부분이라면 '사랑'이겠지만, 레오나르도 보프가 자신의 글에서 서술했듯, 사랑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복잡하고 어렵고 난해하니까, 사람마다 맥락마다 상황마다 다층적으로 할 필요가 있겠다.


음, 한 순간에 떠오른 생각을 가지고 적었더니, 글이 엉망이지 않을까 싶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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