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9. 15:39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개역개정 -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가톨릭 성경 - 마태 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공동번역. 마태 5:13)
바꾸면, 짠맛을 가진 소금이 돼라는 가르침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간직할 때(짠맛을 간직한 상태를, 소금이 소금 다운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발에 가지 않고 입으로 간다고 가르치십니다. 짠맛인 채로 갈 수도 있고 다른 데 섞여서 중화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짜지 않다면 소금으로서는 사람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고 봅니다.
입으로 음식물을 먹으면, 필요한 성분은 흡수하고 아니면 배출한다. 일부는 장 어딘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신자가 짠맛을 간직한, 곧 제대로 된 소금일 때, 그리스도신자는 먹힌다. 음 진짜 먹힐 수도 있으려나. 나는 그리스도신자가 '가십거리'가 된다는 바를 말하고 싶다. 주위나 세간에서 떠들어 댄다는 말이다. 떠드는 건 짜든 말든 무관하게 한다만, 어떻게 다른지는 이 글을 읽는 이라면 이미 아리라고 생각한다. 떠드는 이는 '짠 그리스도신자' 이야기를, 내장 깊숙히 소장한다. 누군가는 그대로 배설하고 누군가는 분해하고 흡수하여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라도 작게나마 바뀌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떠든다"라는 어휘는, 조용하게 생각하는 경우나 시끄럽게 하는 경우나 모두 포괄한다.
이렇게 가십거리가 되는 삶을, '여운을 남기는 삶'이라고 하고 싶다. 곤, 그리스도신자는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설가 전상국은, 좋은 제목이란 자고로 함축성과 '여운성'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참고. 창비 2009 개정 문학 교과서). 기억할 때, 사람은 전부가 아닌 요약된 형태로 혹은 포괄하는 주제 등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주제'라고 하자. A라는 이가,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여운을 느끼면서 자기 삶의 양분으로 삼는다면, 이 또한 그리스도신자다운 삶이리라. 또 다른 좋은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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