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미술 등

뉴먼, 파괴 = 창조와 원작품

miff 2023. 4. 30. 14:06

2018. 8. 25. 9:58

 

 

바넷 뉴먼이라는 색면 추상 작가가 있다. (색면 추상이란, 추상 표현주의의 한 갈래이다) 뉴먼의 작품 중에는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 III>라는 작품도 있다. 너비가 약 5.5m인 캔버스에, 제일 왼쪽 끝 조금 파란색이 있고 나머지 면은 선명한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다. 작품명에 III가 포함됐는데, 이 작품은 연작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이 칼로 연작을 훼손됐는데, 세 번째 작품인 빨간색을 제일 크게 훼손했다고 한다.


작품을 훼손한 사람이 미친 것일까요,

뉴먼의 그림이

이 사람을 미치게 한 것일까요?

양민영, 「서양미술사를 보다 2」(리베르스쿨; 서울, 2013), p296


백남준 선생, <다다익선>을 구성하는 브라운관을 교체하든 말든 그건 후대의 일이라며 넘기셨다고 한다.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라고 백남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다다익선>을 함께 만든 분께서 전하셨다. 이 말이 '비디오아트'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백남준 선생께서도, 비디오아트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히포크라테스가 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문장을 바꾸려면 다 바꿔도 되는데 바꾸지 않으셨다.

 

한 예술 작품이 있고, 한사람이 이를 파괴했다고 가정하자. 뉴먼의 그림을 칼로 그은 사람을 상상하자. 이는 예술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행위였을까? 이로 인해 뉴먼의 의도가 실패했을까? 그 사람은 예술을 소거했을까? 예술이란 작가가 아닌 이상 혹은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닌 이상 건들이면 안 될까?

 

한 예술 작품을 손대어 일명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지 인간은 편집해서 수용한다. 작품을 내가 경험한 순간, 작품은 작품 그대로가 아니다. 경험자는 본인이 내면으로 재구성한 결과물로 작품을 경험한다. 본인이 재구성한 산출체産出體를 선보여, 또 다른 재구성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짜리하겠나. 예술 작품의 파괴는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독법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파괴를 적극 권장하고 싶다. 누군가는 '2차 창작'이라 부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더 넓은 범위를 지칭해 부르고 싶다. 그냥 파괴까지 권장하고 싶다. 파괴는 가시적으로나 비가시적으로나 '틈[暇]'을 생성한다, 혹은 확대한다. 일명 '새로움'은 이 틈에서 나온다. 파괴야말로 창작이고 상상이고 창조이다. 원작을 감상할 기회만 아니라, 다르게 보는 기회까지 준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위로 다 때려부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작가가 작품을 공개한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본 작품으로 의도한 바가 있잖겠는가. 관람객이라면 이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작가와 관람객의 관점에서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서 말이다. 무작정 훼손하는 행위는 작가를 해치는 행위일뿐 아니라, 또 다른 관람객의 기회를 앗아가는 도적질이기도 하다. 작가가 작품을 공개한 이상, 공개된 작품은 개인의 소유물이나 공공公共에게 스스로를 보인다. 공공에게는 이를 관람하고 관찰하고 포착하고 잡아챌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 바뀐 작품으로는 원작을 생각하기 힘들다.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고로 나는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라고 권한다. 파괴하고 싶으면 똑같이 재현해서 복제품으로 파괴하기를 권한다. 제작자에게 파괴할 용도로 쓰겠으니 하나 더 만들라도 해도 예술 작품과 작가와 다른 이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표출하는 창작이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


뉴먼에 관해 참고한 책

서양미술사를 보다저자양민영출판리베르스쿨발매2013.12.26.

양민영, 「서양미술사를 보다 2」(리베르스쿨; 서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