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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부산 기독교 유적지>

miff 2023. 4. 25. 14:02

2018. 2. 12. 17:40

 

부산에 있는 기독교 유적지 탐사를 했습니다. 장소를 읊는 것은 안내자의 블로그에 훨씬 정리가 잘 돼 있기에 안 할게요!

김학천의 조선선교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김학천의 조선선교 : 네이버 블로그

히스토리콘텐츠 & 조선선교연구소 대표 김학천

blog.naver.com

세 군데를 갔습니다. 동래중앙교회, 부산진교회, 초량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동래중앙교회에서 간단한 부산 기독교사를 듣고서 부산진교회초량교회에 현장답사를 가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장기려기념 더 나눔 센터를 갔습니다. 나눌 내용은, 장소에 대한 소개가 주가 아닙니다. 보고 들은 장소에서 만난 믿음의 선배 몇 분을 소개하고, 유적지 탐사 내내 든 생각을 서술하고 마치겠습니다.

모인 사람 성격상 기독교-개신교-장로회를 중심으로 배우고 돌아다녔습니다


 

1. 한국에 들어올 때 첫 경유지가 부산이긴 하지만, 다들 경유지로 이용하던 탓에 제대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부산에는 어떻게 복음이 증거 됐을까요? 중국에서 선교하시던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라는 선교사께서 쓰신 편지를 한 통 쓰십니다. 한국, 특히 부산•경남 지방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호주에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호주에도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월푸가 쓴 편지는 「국내와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라는 잡지에 편집돼 실립니다. 잡지에 실린 편지를 본 한 사람이 부산에 가겠다며 나섭니다.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라는 호주 장로회 선교사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에 복음을 증거한 첫 선교사입니다.

한국에 온 데이비스 선교사님께서는 서울에서 한국어를 먼저 배웁니다. 몇 개월이 지나고 한국어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부산-경남 지방으로 내려오십니다. 순전히 도보로만 걸어 내려오십니다. 중간에 병이 들어 습식과 음수도 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몸을 이끌고서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십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인 4월 5일에 소천하십니다. 전염병에 걸렸는데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선교하고 이동한 탓이었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님은 '부산에 오자마자 하루 만에 돌아가신 선교사'가 되셨습니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잘 살다가 선교하러 왔는데, 선교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하루 만에 돌아가셨으니깐요. 씨 한 알이 더 이상 씨가 아닐 때야 열매가 맺힙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님 또한 '씨'로서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님께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이 호주에 전해지자 '후배 선교사'가 한국, 특히 부산-경남 지방에 많이 오시게 됐습니다. 해방 후까지 부산-경남 지방에 온 호주 선교사 명수만 대략 120명이라고 합니다. 부산 땅에서 흩어진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갚으셨습니다.

 

2. 1919년 3월 1일, 일제가 행하는 '무단통치'에 반발하여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습니다. 남부 지방인 부산에서는 3월 11일에서야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신여학교라는 곳에서 시작됐습니다. 학생이 하루 전인 10일에 모여서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당일 11일에 밖으로 나가 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태극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일장기를 그리라고 강요받던 시절이니 일장기가 있었습니다. 일장기 가운데 있는 붉은 원 위에 태극의 푸른 부분을 덧칠했다고 합니다. 내려 오는 태극기를 잘 보면, 붉은 빛이 남은 푸른 태극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일장기마저 없으면 천에 밥그릇 같이 둥근 물체를 대고 태극을 그렸다 합니다.

일신여학교역사관에 보면 태극기를 그린 분의 회고록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옷 지어 입을 아주 좋은 천이 있었는데, 이 마저 찢어 태극기를 그리는 데 썼다고 기록하셨습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러 어른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배운 대로'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하십니다.

 

3. 제가 부산 기독교 유적지 탐방에서 느낀 점은 위에 기록한 두 이야기에서 더 나옵니다. 궁극적으로 깔린 감정은, '아픔'입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통탄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한국 땅에 많은 선교사께서 오셨고 믿음을 시작하는 세대가 일어났으며, 두 부류에 속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던 많은 분께서 피를 많이 뿌리셨습니다. 많은 선교사께서 오시고, 목회자가 많아지고, 마음 편히 그리스도교를 종교라고 고백할 수 있고, 옮길 교회가 많은, 현재 한국 형편이 '열매'라고 할 정도이겠습니까. 제 대답은 "거의 그렇지 않다."입니다.

 

4. 데이비스 선교사님께서 살아내신 일생을 돌아보면, '미친 사람' 혹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려도 변명 못 할 인생을 사셨습니다. 단순히 감정에 휘둘린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대체 어느 사람이, 자신은 일말의 영광을 얻지도 못하고 죽음과 고통만을 금생에서 누리는 삶을 살아갈까요. 그 선교사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지금도 많은 선교사님께서 그렇게 사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한 발짜국 더 내딛지 '못'하고 '안' 내딛을까요.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난 걸까요. 모두 인간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두 부분에 한해서는 다른 점이 없어 보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님께서 저리도 헌신하신 이유를 안다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유였겠습니까, 기쁜 소식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선교하러 오셨으니 말입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에 마찬가지로 불변합니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주는 이름이라는 사실과 이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사로운 차이점을 제외하면 동일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요.

한 글이 떠오릅니다. 십자가가 우리 앞에 세워졌음을 알고 십자가가 십자가인 줄로 아는 우리인데 왜 복음의 능력이 없는지 한탄하며, 우리가 제대로 알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 고백하는 글이었습니다. 진짜 아는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한 신학자는, 꿀이 달다는 사실을 들어서 아는 사람과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서 아는 사람이 아는 정도가 다르듯이,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경험했는가 경험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가 하나님을 아는가. 한 인격체'를' 알려면, '카더라 통신'으로 들어들어 알면 안 되고 면전에서 직접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르는 경험말입니다. 많이 만나면 많이 만날수록 많이 알게 됩니다. 많이 알수록 저도 모르게 닮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과 많이 만날수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더 자라가게 됩니다. 성령 안에 더 깊이 거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성부께서 계획하신 것을 이루게 하는 권능을 받게 됩니다.

'나'는 왜 안 되는지, '우리'는 왜 되려 억압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아 진짜 알지 못하기 때문 같습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시는데, 스스로 "하나님은 숨어 계셔!"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계시해주신 하나님, 그분에 대해 아는지 혹은 그분을 아는지도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나 신뢰하지 않았고, 얼마나 맡기지 않았고, 삼위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정말 얼마 되지도 않았음을 되돌아보니 능력이 없음은, 진짜 따르지 못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각자 모습은 다를지라도 그 길을 걸을 방법 아닐까요.

 

5. 일신여학교, 거기서 있던 일을 돌아봅니다. "배운 대로."라는 말이 제 가슴을 칩니다.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라며 통탄해 합니다. "나는 배운 내용을 실천하려 했는가?"라고 뉘우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청소년은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요. 지극히 내면화되고 개인화된 정보가 아닐까요.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지 실생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뭘 배웠을까요. 수많은 목소리와 말을 들었고 텍스트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까, 사고합니까, 사색합니까, 질문합니까. 내가 무얼 아는지, 무얼 믿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어떤 점이 문제인지.

우리는, 저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행동하는' 시민,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말입니다. 저는 더 질문하려고 합니다. 질문하라고 주위에 촉구하려 합니다. 배우려고 합니다. 같이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더 준비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선지자도,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행동했듯이, 준비되어 어느 상황이 오든지 적절히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땅한 때, 마땅한 방법, 마땅한 대상, 마땅한 강도, 마땅한 동기를 갖도록 준비하고자 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자유로워지리라고 믿기에,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일하시는 데 사람의 협동을 요구하신다고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