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여행

2018 희년학교 내 마음대로 후기

miff 2023. 4. 28. 13:53

 

@ 한 사람에게라도 담론 확장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올리는 이 글에서 기도함: (1) 위로하시는 주님께서, 내 이 글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받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친히 보듬어주시길. (2)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가 상처와 고통으로 끝나는 것/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어버이께 영광 드리는 열매가 되길. (3) 친히 폭력을 자행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내 마음 가운데 페리코레시스적 사랑을 허락하시길. (4) 제발 그만 괴롭히도록 '그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셔서 제게 직접 말하게 되기를.

 

 

1. 전 희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희년을 마음에 새긴 건 중학교 3학년쯤일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후 기독경을 읽다 보니 희년을 다시 수용하게 됐습니다. 이때는 레위기 25장 8절 이하,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 루카복음서 4장 18-19절을 유기적으로 엮어서 이해했습니다. 제 신학 • 교리 지식과 희년 이해를 엮어서 이해할 때, "희년은 하느님나라의 온전한 실현 모습 중 하나겠구나"라는 판단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느님나라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기엔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상 세계로만 다가와서, 이 중의 하나인 희년도 유토피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는 다른 개념과 동일하게 지극한 이상 세계인데, 익숙하기는 희년보다 다른 개념이 더 친숙하니 희년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2. 그러니 <희년함께>의 <희년학교>에서 '희년'을 주야장천 강조하는 모습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굳이 왜 이 개념을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도 희년을 그렇게 강하게 강조할 것이냐?"라고 혹자께서 물으신다고 할 때, 저는 "네."라고 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희년이라는 개념으로, <희년함께>에서 주도하고 있는 활동의 하나님나라 연계성을 확실하고 확고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충분히 납득했습니다. 제가 동화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왜 낯설기만 할까요? 제 답변은, "아직 제가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이겠습니다. 좀 떨떠름한 상태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겠습니다.

 

 

 

3. 제가 보기에, <희년학교>를 실시하는 목표는 '희년'을 널리 알리고 '희년 운동'을 함께할 동역자를 더 많이 만나고 만들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더 풍성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족한 제 식견으로는 이 두 가지만 파악했습니다. 따지고 들자면, 저는 <희년학교>를 실시한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일종의 '반례'가 됩니다. "동화되도록 이끌지 못했으니 실패했으며 능력의 부족함을 증명했으니 무슨 가치란 말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하지만, 저는 저 질문에 부정의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시듯이 목표가 쉬이 이루어지진 않잖습니까. 하느님나라와 희년의 연계성 - 연관성을 절감했고, 희년을 공부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여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4. 제게 이런 경험이 없었다고 해도 <희년함께>에서 꾸준히 이어가는 모든 활동은 굉장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번 <희년학교>에 참여하며 느꼈습니다. 첫째 가치로는, '하느님나라 운동의 구체화'를 들겠습니다. <28회 희년학교>에서 개최한 강의에서 인상 깊은 어구로 "희년은 하나님나라의 모델하우스다."를 뽑겠습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구체화하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았다는 부분이 좋습니다. 희년법은 사랑, 회복, 해방, 평화와 같이 하느님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신을, 토지를 반환하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는 작용에서 풍성하게 표현합니다. 이를 본받아 희년법에서 실시하는 세 가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다양한 작업을 <희년함께>는 해나가는 와중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자칭이든 타칭이든)이 마태오복음서 6장 33절을 본받아 "나는 하나님나라를 첫째로 두고 살아갑니다!"라고 외치면서도, 서로의 하느님나라가 달라 모순되는 모습을 서로서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해 성취할 목표를 논의해서 구체화하여 일치하도록 함으로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하나됨'이라고 할 수 있겠죠?

 

 

5. 두 번째 가치로는 '확장을 통한 지속성'이라고 일축하겠습니다. 제가 본 <희년함께> 그리고 <희년은행>의 확장은, 제국주의적 확장이 아닌 다리 짓기에 가까운 확장이었습니다. 장場을 만들어서(제가 경험한 장은 <희년학교>였고 더 있더군요) 사람과 사람끼리의 맺음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서 코뮤니타스와 개인, 그리고 코뮤니타스와 코뮤니타스와의 맺음을 새로이 하고 굳히는 확장 말입니다. 연대라고 말하기에는, 연대라는 단어가 함유하지 못하는 측면이 본 만남에 있습니다. 이 만남에서 연대도 이뤄진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점이 장점이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야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와 강의 사이, 다 같이 둘러앉아 얼굴을 보면서 나누는 회고와 코이노니아, 티룸에서 들리는 대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담론은 영상으로는 경험 못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맺음'은 장場에서만 끝나지 않고, 흩어짐을 통해 각기 다른 곳에서 새로운 맺음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육을 꾸준히 하고 청년과 함께 함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도록 유지합니다.

 

 

6. <희년학교>가 끝난 다음에, 참 좋았습니다. "좋았다"라는 말이 참 적절합니다. 대안 공동체가 계속 유지되고 있고, 대안 체계가 제시되고 있고, 약자를 챙기기 위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데서 계속 움직이는 분이 계시고, 희망을 아직도 놓지 않고 계시는 분이 있고, 서로 흩어지기보다는 만나서 함께하려고 애쓰시고. 사회에서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에서 있는 문제를 계속해서 절감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아무리 애써도 권한자(혹은 권력가, 권위자)에게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너무 속상했습니다. 많이 억울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여기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희망이 작은 희망인지 큰 희망인지, 큰 영향력을 지녔는지 작은 영향력인지, 큰일인지 작은 일인지 잘 가늠하진 못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빛을 찾았다는 사실은 꽤나 큰 위안이지 않습니까.

 

 

7. 셋째 날 저녁, 저는 새벽 2시까지 하느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매달 한 번씩 가지던 시간을 계속 이어가려던 노력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한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큰 걸음이라는 뜻과 한 걸음이라는 뜻을 모두 포함합니다. 작은 한걸음을 쓰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의 걸음을 걷기로 했습니다. 00시 언저리에 자고, 7시 언저리에 일어나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책 보고 떠들고 공부하고 다시 자는 제 일상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 와중에 위에서 언급한 여운성에 타서, 제가 발견한 언어를 공부하고, 주위에 알리고, 계속해서 담론을 형성하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나라 운동에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희년 운동에 기꺼이 함께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운동에 많은 분이 함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다음 세대에게 많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이런 운동을 지속하고 계시는 모든 단체와 주체에게 깊게 고맙습니다.

 

 

*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공부할 로드맵을 제시해주면 좋을 텐데 <희년학교>에 참여하고 나면 끝이라는 점입니다. 저 같은 경우야 미리 찾아놓은 강의와 책이 있다지만, 상황은 다르니까요. 사후 대처만 개선이 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캠프 도중에 비는 시간이 많으니 그 가운데서 관계를 형성하면 해결되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게 힘든 분도 있으니 따로 마련하거나 팸플릿처럼 배부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