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0. 18:34
※ 2018년 6월 7일에, 학력평가를 치면서 남은 시간에 한 생각 첫 번째.
지금 와서야 추가하는 내용도 있습니다만 그냥 구별치 말고 읽으시면 될 듯해요.
교회의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있지는 않은지라 말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아는 점은, '싸우지는 않는다'는 점은 압니다.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면, 왜 싸우지 않을까요. 서로를 '존중'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데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도교회 안에서의 하나됨이라고 한다면, 상반과 모순이 양립하는 선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회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부터가 '양립 가능성'을 체택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다음에 제가 쓸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일단, 상반과 모순의 양립 가능성이라고 했을 때 그리스도교회에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들 수 있겠습니다. 먼저로는 교리(신앙고백)적인 측면이요 다음으로는 정치적인 측면입니다. 이 둘을 똑 분리해서 이해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입니다. 둘은 아무 긴밀한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읊으면서 양립 가능성을 읊는 작업은 제 능력 밖이기에 그냥 이 두 측면에서 서로 양립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회로서 다양한 모순을 양립화한 상태로 시간에 올라탄다라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는 '동행'입니다. 그리고 이 동행이 깨지지 않고서 끝을 맞이하려면 서로가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선이라는 말인즉슨,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서 계고 수용하고 개방하고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배우고 질문하고 듣고 가르치는 모든 행위를 지칭합니다. 니고데모의 태도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당대에 존경을 많이 받는 학자였을 그가, 질문하고 배우려 하고 이해하려고 한 그 태도는 정말 좋은 태도입니다.
결국 끝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을 잘 보내기 위한 목적 또한 중요합니다. 목적은 '계시를 근간에 깔아서 건져낸 평화'입니다. 일부로 계시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과정의 방안은, 비폭력적으로 해야 할 터이지마는 폭력도 허용되는 걸까요? 폭력과 비폭력은 절대적으로 정해지는 걸까요, 일정한 규칙은 있되 맥락에 따라 다른 걸까요, 완전 상대적인 걸까요 우리는 폭력과 비폭력을 가르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폭력은 어떻게 나눠질까요? 물리적과 비물리적으로 나눌 수 있을 거 같군요. 근데, 비물리적인 영향이 물리적과 같은 결과를 냈다면 물리적 폭력과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물리적이지 않을 행위가 있을까요? 물리적인 행위와 물리력을 구분해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