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31. 0:29
사르트르 실존주의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터치 (tistory.com)
AG는 약동하는 영원성을 여러 형식과 연결한다. 거대 관점에서 본다면 '정지'된 상태로 일축할 수 있으나, 두 부류로도 나눌 수 있다. 두 경우의 대표작을 각각 제시했다. 구글링해서 다른 각도의 사진도 찾아보길 바란다. 화면 가득히 채워서 조용히 묵상하면서 감각하고 수용해본다면, AG 조각상의 무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빨리 넘기지 말고 1-2분 정도 감상하면 좋겠다.
1. 먼저는 완전 정적인 자세이다. AG의 조각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류이다. 대표적으로 AG의 유작인 <로타르 III>을 뽑을 수 있다.
얼굴 터치가 굉장히 깔끔하며 눈이 선명하다. 눈빛에 압도될 지언정 어찌 잠잠하랴. 몸의 격동적인 터치가 이전 작품보다 더 격렬하다. / 과도하게 확대하니 화질이 안 좋다. 인터넷에 검색해 묵상하도록 하자.
2. 두 번째인 '움직이는 듯'한 자세는, AG의 대표작인 <걷는 사람Walking Man>이 있다. 아래는 <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중에서도 <걸어가는 사람 II> 사진이다.
사진 질이 안 좋다. 구글링하면 좋은 사진이 많이 나오니, 감상은 그걸로 하자.
굳이 '듯'을 붙인 이유는, 두 모습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라는, 이집트 미술 작품도 볼 것이다.
기자에서 출토, 기원전 2599~2671년, 전판암, 높이 138.4cm, 파인 아트 미술관(보스턴) / 사진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514289327451117/
두 조각상을 잘 기억해놓고서 내 글 따라 생각해보면 좋겠다.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를 보면, 왼쪽 발을 내밀고 있다.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적인 형태를 추구하던 이집트 미술답게, 발을 내밀었으나 걸어갈 것 같진 않다(H.W.잰슨 & A.F.잰슨, 「서양미술사」(미진사; 서울, 2008년), p.56).
(1) 상체만 보자면 다른 AG의 작품과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을 같이 봐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정적이다. 하지만, 옆으로 보면 앞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2) 하체를 보자.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와 다르게, <Walking Man>의 보폭은 굉장히 넓다. (3) 마지막으로, 제일 밑단인 '발'을 보자. 뒷발 뒷꿈치를 듵고 있다. 인간이 걸을 적 태도이다. (4) 동動과 정靜이라는 모순성이 하나돼, <Walking Man>이 된다. AG가 목도한 "구체적인 인간"에는 모순성이 중요했지 않을까. 발을 내민다는 동적 자세로 정적인 모습을 연출한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와 다르게, <걸어가는 사람 II>는 정靜과 동動을 엮어 "구체적인 사람"을 형성했다.
(이집트 미술하고 비교하는 건 다음에 포스트 하나를 다 써도 부족할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AG는 "걸어갈 때는 가벼움"을 보여주려 했다고 고백했지만, 되려 '무거움'을 목격했다. 인간 실존이 토해내는 산출물은 극히 무거우나, 일반적으로 잊고 산다는 뜻으로 해독했다. '걸어감'은 문자 그대로의 걸어감이 아니라 은유로서의 걸어감이다. 사르트르적으로 말하면, 자유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거움을 인식함이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인지하고 쳐내며 살아감을 뜻한다고 봤다. 동動과 정靜의 적절한 배합을 살아냄이 자유와 책임을 살아내는 존재이리라. 그리고 (사람들이 <걷는 사람>에서 주로 찾는 주제인)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은, 둘 사이에서 본질을 창출하며 내재화하고 발산해서 여러 존재를 잇는 실황實況에서 '옷 너머'에 있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3. "구체적인 인간"을 보려는 노력이, 시도가, 의도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났다 : (1) 이상하게 눌리고 길어진 형상 (2) 옷이 벗겨진 듯한 모습. "구체적인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모든 사항을 덜어냈다고 보면 되겠다 싶다.
가치를 온전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AG는 축약하고 늘여서 주조했다. 극히 위태로워 보이는 조각상이다만, 이 때문에 조각상의 무게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옷을 없애기도 했다. 옷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이념이 깊게 가미돼 사회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서의 인간"으로 집중하게 돼, "구체적인 인간"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없앴지 않았을까. AG의 조각상 대부분은 옷이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옷 너머의 인간'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계기이다.
묵상하다가 적었는데, 올리기에는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폐기하려던 내용도 추가해본다.
: 발이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한다. 얼굴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하다. AG 조각상의 '무거움'을 내포하는 또 다른 은유이지 않나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동일한 청동이라고 했을 때, 밀도를 달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부피가 증가할수록 무게도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 (조형물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이즈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만, 조각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므로 이렇게 해석하겠다.)
이번 포스팅에서 참고한 책은 없다. 도록마저, 저번에 보던 디에고 섹션에서 더이상 진척이 없이, 내 머리에 기억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상만으로 묵상했다. 이런 속도라면, 이번 년이 끝날 때까지 도록 전체 묵상하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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