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0. 23:54
하교 후 집으로 걸어오는 길, 할 게 없어서 자코메티를 생각하기로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만, 수학여행의 한 경험이라는 책이 책장에 꽂힌 후에도 계속 써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저번 글에서 이어서, '정면'과 '꼿꼿함'에 대해 생각했다. 저번 글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정면과 꼿꼿함을 구별하지 않았던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내가 쓰는 '정면'은, 시각적 인지를 이미 포함한 동사형 명사이다) 휴대전화를 걸으면서 볼 때, 팔을 높이 들지 않으면 목은 90도에 가깝게 그냥 떨어진다. 90도 휜 목으로 걷는 이도 정면을 보며 걷는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즉 앞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리라. 앞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나아가더라도 보지 못할 때보다 추진력이 떨어진다. 앞을 앎, 그러기 위해서 정면을 바라봄은 단단하게 걸으려는 큰 조건이다. 하지만, 휘더라도 정면을 볼 수 있기에 '정면 = 꼿꼿함'은 아니다. 꼿꼿함은 늘 정면인가라고 한다면, 이 또한 아니다. 눈알은 어디든 굴러갈 수 있으니까.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만든 (그리고 디에고(형제이다)가 보존한) 조각상은 정면과 꼿꼿함을 모두 갖추었다. 단단하게 걸으려는, 단단한 걸음에 큰 가치를 둔,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걸음'이란 무엇일지로 돌아왔다. 자코메티가 말한 걸음은, '생生'을 기술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 단어는 다짐, 의지는 물론이거니와 의미를 창출하고 인생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질긴 지구력까지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이하 AG)가 나는 다시 걷는다고 말한 내용과 맥락을 생각하니 이런 결론이 나왔다. AG는 실존주의자다. 사르트르, 사무엘 베게트 등의 실존주의자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AG의 '걸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AG의 인생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실존주의에 대한 유용한 이해와 예술 작품 독해력까지 갖출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AG를 기술한 자료라고는 '도록'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블로그에 기술한 AG에 대한 (도록에서 발취하는 인용문과 정보를 제외한) 모든 내용을 내 상상에서 쓴 나로서는, 이 단계까지 나갈 수 없다. 눈빛, 조각, 아우라, 너머의 것, 생명, 죽음과 걸음이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기란 아직 넘지못할 산이라고 판단한다. 언젠가는 하게 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AG가 한 말에, 디에고를 조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고 조각이 디에고인지 못 알아보겠다는 내용과, 디에고하면서 디에고가 아닌 AG 자신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디에고는 AG의 엄청난 뮤즈였다. 그에 관한 조각에서 이리 말했다면, AG의 진솔한 고백이며 이에 주목해야 할 당위성이 생긴다.
저 두 내용의 공통점을, 나는 '눈빛'에서 찾았다. AG 묵상 초반글에서 설명했듯이, 눈빛은 수많은 시선이 함께해서 형성된다. 디에고가 뮤즈로서 10정도의 거리보다 떨어져서 있다면, 뮤즈이지 때문에 꽤나 오랜 시간동안 있을 것이므로, AG가 생명의 중요성으로 '눈빛'을 담고자 하는 기간에 있는 디에고의 눈빛은, AG의 시선과 디에고의 시선이 끈적거리게 함께하는 눈빛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로, 디에고 스스로가 보여주던 모습보다 AG 스스로가 디에고에서 뜯어내는 모습을 AG는 포착하고 이를 조각으로 남겨 생명을 담는다. 다른 시선과 다른 눈빛이 하나돼 형성된 디에고 고유의 눈빛을 AG가 조각하려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고 유심히 할 때, 다른 시선과 다른 눈빛이 하나돼 형성된 자코메티의 눈빛이 디에고의 눈빛과 만나, 디에고가 간직한 생명 • 눈빛 • 존재는 AG가 (고의든 비고의든) 창조해낸 물체物體가 된다. (참고. 여기서의 물체는 가시적, 비가시적 곧 형이상•하적을 모두 포괄하는 어휘다.)
AG가 인식하는 디에고는 조각 시작 지점과 마침 지점 사이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디에고가 디에고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AG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조각상은 디에고와 똑닮았고 디에고는 디에고 그대로였다. 디에고를 조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고 조각이 디에고인지 못 알아보겠다는 내용의 앞에 나오는, AG가 설명한 부분이다. 디에고는 AG의 독점에서 벗어나 농도라든가를 다시 조율하며, 조각 전과 비슷한 디에고로 간다. 이러한 상태이니, 조각 시간 중 디에고인 조각상과 통전적 시간 내 디에고는 다르다. 조각 시간 중 디에고는 자코메티가 독점해서 형성한 디에고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자코메티의 눈빛과 시선으로 만들어진 디에고이므로, 거기서 자신을 본다는 건 당연지사이리라.
눈빛이 다는 아님은 확실하다. 크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눈빛으로 중요한 판단 -- 곧 동일성 판단을 단락지을 수 있음은 확실하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게, AG가 원하고 AG를 연구한 학자들이 옳다고 여기는 견해인지 아니지는 난 모른다. 내가 읽어내고 파헤치는 AG의 조각상일 뿐이다. 그냥 가볍게 읽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한국의 흔한 청소년이 묵상한 내용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같은 생각에서 두 가지 소결小結을 내고자 한다. 대결大結을 내릴 날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현재 생각으로는 말이다. 예술은 자유로 인해 만들어지는 물物이다. (물은 위의 물체와 비슷한 의미이나, 범주가 다르다. 더 생각해야 할 두 단어이다.)
문제라는 어휘를 썼지만, '지속적일 주제'라는 의미도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처음은 '독점'의 문제이다. 위에서 AG가 디에고를 독점했다고 언급했다. 디에고를 AG의 눈빛으로 짙게 물들게 하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자신을 돌아보게 됨. (2) 한 존재 안의 눈치채지 못하던 뭉텅이를 알아채게 됨. (3) 세상을 어색하게 보게 됨. 이 셋이 독점으로 인해 얻는 바이다. AG의 고백을 정리한 내용이다. 부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겠으나, 삶을 구성함에 있어 필수적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독점해보자.
밀폐된 공간에서 둘만 있는 채로 보는 것만 독점일까? 아니라고 본다. 순간의 눈빛을 가져와 소장하며 소화해서 간직하는 것 또한 독점이라 할 수 있겠다. 눈빛을 기억하는 것 또한 독점이라 할 수 있겠다. 뭉텅이를 입에 물어서 먹기도 독점이지 않을까. 독점은, 형성에 관여하는 주체의 단일성을 의미하나? 독점이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둘째는 '순수성과 자발성'이라는 문제다. 오로지 '나'로만 만들어진 '나', 는 가능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더럽혀야 나는 나가 된다. 곧 '나'가 '내'가 되는 때라야 진정한 '나'가 된다. 온전한 존재는, 많이 만져지고 거듭된 존재이다. '나'만으로는 '내'가 될 때 필요한 'ㅣ'라는 추가적인 시선과 더해지는 눈빛을 창안할 수는 있어도 주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드러나는 존재는 자발적인가? 드러내는 주체가 원해서 드러내는가? 완전히 맞지는 않다. 드러내는 순간, 존재 내內 뭉텅이는 뜯겨진다. 뜯겨지는 뭉텅이는 숨기고자 했던 더미일 수도, 모르던 뭉치일 수도, 목격하는 자가 목격되는 자와 안 맞게 만든 덩어리일 수도 있다. 드러남은, 자의와 타의가 이상하게 엉킨 산출물이다. 결국 우리는 벗겨진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매순간 덧칠되는 그대로를 보게 된다. AG가 말한, "있는 그대로"는 어떤 그대로일까?
1. 독점의 문제
2. 자발성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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