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강의 등

[폭력의 시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 강남순 교수 (강의 노트)]

miff 2023. 4. 9. 13:09

 2017. 8. 29. 21:59

 

global : 너무 획일화 시킨다. 각 사람의 다양성을 전혀 존중치 않는다.
planet : 다양성을 존중한다.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한다 = 기준이 있다 => 비인간적 획일화. 인간에게 우열이 있다는 사상.
공부 = 탈 자연화 과정 = 비판과 회의할 줄 아는 정서를 갖는 방법.
자명하다하는 말은 없다.
planetary love <=> 코즈모폴리터니즘 (어떻게 관계할까?)

 코즈모폴리터지므의 귀환왜 코즈모플리턴이 세계 화두가 되었을까? 원래 이 운동은 있었는데 말이야.
다양성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나누는 틀을 주류가 가지고 있다. 주류에게는 형용사 - 곧 특별한 표지가 덧붙여질 필요가 없다.


폭력이라고 하면, 무수하게 많은 비가시 폭력이 넘쳐난다. 그래서 현재에는 비가지 폭력이 엄청나게 삶을 갉아 먹고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고 있다." 우리가 저지르는 - 당하는 폭력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동일한 폭력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코즈모폴리터니즘 : 그리스서 시작 /  "Where are you from?" 이라는 질문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공간 소유권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 속해있는데, 너는 언제 돌아갈거니?' / 사실, 이 질문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이 나온 배경이다. / 디오겐네스라는 사람이 "나는 우주에서 왔어"라는 대답을 해서 시작. /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 : 1.두 종류 시민권(출생지-국적, 태양 = 둘 다 인정), 2. 존재론적 평등성(regardless) => 꼭 나누려는 폭력을 이기려는 노력 
 칸트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영구적 평화) :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조건(다른 조건 - 국가 유무까지 - 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로 모두를 끌어안기, 존중하기. / 목적의 나라(Kingdom of Ends -> Kindom of Ends) :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니 '낮꿈'이라도 꾸자. 낮꿈을 꾸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나라'겠지.)


 불교와 기독교 담론 중에서 불교는 생명을 중시하고 기독교는 인간을 중시하니, 불교가 더 뛰어나다 = 칸트는 동물과 식물 생명을 생각지 않았다. / 비교 종교는 별로 좋지 않다. 기준은 누가 정해? 딱히 공통성이 없어도 같이 하면 되지, 왜 굳이 비교하려고 드는가? / 칸트도 한계가 있었다. 인간지리학이라든가. 
 아렌트의 코즈모폴리탄 : 인류에게 저지르는 범죄가 공식화 됨. 단순히 한 집단만 강조하지 않고, 모두가 동료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개념을 없애자. (우리가 모두 하나님 자녀다.) I am You when I am I. 실존은 언제나 함께이다 = 정의, 평등, 권리.


 구제(charity)와 정의(justice)와 권리(rights)는 다르다. / 구제 행위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정의는 '왜'를 묻는다. "Why it is what it is?"공부하는 사람이 항상 던져야 한다. 공부란 '탈자여화'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상 권리를 침해한다. 윤리적 위계를 발생시키기에. 권리는 시혜 대상이 아니다, 그냥 당연한 거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소한 단어 하나가 사고 자체를 바꾼다.)
 코즈모폴리탄 권리 = 개별성의 권리는 개별인을 존중하는 사상을 말한다. 범주를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는다. 동질성의 공동체(community of sameness) = 어느 그룹이든지 선을 긋게 되어 있다. 내집단과 외집단 차별이 극심하다. 다름의 공동체(코즈모폴리터니즘) = (다름alterity : different가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면, alterity는 비교 불가한 다름을 뜻한다.) 생명은 그냥 귀하다(regardless). / 연대도 동일하다. 우리는  동질성 연대에서 다름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종교하고 어떻게 연결되는가?
 종교란 무엇인가?(인지적 질문) =>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훨씬 선행하는 질문 - 생명 관련 질문) / 종교적인 사람 = 사랑, 연대(love, 마 25:31이하) - 이런 개념이 사회-정치적으로도 퍼질 수 있도록 좋은 위정자를 뽑아야 한다. 현대에서는 한 명 한 명 만나기가 힘이 드니. 혜택이 돌도록. 이렇게 사랑이 있을 때, 희망과 신앙이 다 실행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사랑은 정치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what이 아니라 who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어두운 면까지도 본다는 말이다.
 종교의 미래는 정치적이고 모험적인 사랑과 환대, 곧 탈낭만화 된 개념으로 다시 끌어안아야 한다. 종교인이 된다는 말은, 결코 편안한 생활이 아니라 다양하고 험난한 모험 속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행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wojDkgLGYg